2. 설악산 입산 수련
천우 스승과의 운명적 만남
천우 선생님과의 만남은 생각하면 할수록 꿈만 같다.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다. 20대 중반 나는 스승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1960년대 초반 8월 말 오후 해 질 무렵 수소문 끝에 천우 선생님을 만났다.  장수대에서 한계령을 올라 오색약수 쪽으로 산길을 가던 중 큰 바위 사이에 싸리문이 드리워진 조그만 암굴이 있었다. 그 안에 노인이 계셨다. 그분께 도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한마디로 거절하셨다. 그러곤 바로 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강력한 무언가에 끌렸다. 무릎 꿇은 채 밤을 새웠다. 아침에 암굴에서 나온 노인은 나를 본 척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산속으로 사라 지셨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이틀을 버텼다. 사흘째 되던 날 노인이 돌아왔다. 노인은 내게 물 한 사발을 내주면서 암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굴 안에는 선생님 눕는 자리와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 뒤 17년간 인적이 전혀 없는 설악산 깊은 계곡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수천 년에 걸쳐 이어 온 선도(仙道)를 천우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선생님은 무술과 의술 등 다양한 방면에서 가르침을 주셨다. 꿈같은 세월이었다. 내가 선생님께 해드린 것은 개울가로 업고 가서 온몸을 씻겨 드리는 것 뿐이었다. 내가 입산할 당시 선생님은 세수 90이셨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12살 때 홀어머니를 여의고 불가(佛家)로 출가(出家)했지만 2년 후 금강산에서 한 신선을 만나 선도에 입문했다. 나는 설악산에서 선생님께 배웠지만, 선생님은 당신의 스승을 금강산에서 만난 것이다. 선생님은 이후 80여 년 동안 세상에 나오신 적이 없었다. 신선들만 만나고 다니셨다. 당신들끼리 만나 담화를 나눌 때, 10년 가까이 나는 감히 같은 자리에 있지도 못했다.
 천우 선생님은 나를 제자로 받으신 후에 비로소 세상 출입을 1년에 두어 차례 하셨다. 나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초식을 하셨다. 그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한 번에 2~3일 정도 '탁발'하시러 세상에 나갔다 오셨다. 산에서는 자연 그대로 평소에는 벌거벗고 지내셨다. 그러다 '탁발' 하러 가실 때만 헤진 곳을 거듭 기워 누더기나 다름없는 두루마기를 입고 내려가셨다. 나는 선생님께 식사를 준비해 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산에서 채취한 잎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풀잎에 맺힌 이슬로 빚은 환을 혼자 드셨기 때문이다.
1984년 초 가을 서울 아현동에 도장을 열었을 때 필자의 행공 모습. 장합에 임맥의 기운을 모아 몸 전체에 운기 시키는 행공을 하고 있다.
7년간 무문무답(無問無答) 수행
나는 선생님의 첫 내(內)제자이자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선생님은 가내(家內) 수행을 허락하실 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무문무답(無問無答)이었다. "여기서는 어떤 질문도 하면 안 되네. 말을 하는 순간 자네는 산을 내려가야 하네."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물어보면 그날로 하산한다는 조건이었다. 선생님이 웃어도 그 까닭을 물어보지 못했다. 실제로 나는 이후 7년간 입을 닫고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문무답을 요구하신 이유를 비로소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사실 말이 필요 없었다. 몸을 닦는 실천과 경험만이 득도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질문과 대답은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었다.
천우 선생님과 최초의 대화
나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수련에 정진했다. 행공이 너무 재미있었다. 설악산에 안겨서 자연의 일부가 됐다 속세 내려갈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 여전히 선생님께 묻는 말은 일절 없었다. 입산해서 7년 넘게 수련하니 숙제도 별로 없었다. 행공 동작도 더 이상 새롭게 배울것이 없었다. 단전에는 단전공이 뚜렷하게 형성됐고 몸이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 평소 나는 말을 잊을까 봐 매일 혼자 중얼거리고 노래도 불렀다. 혼자 물가에서 놀면서 심심하니까. 선생님은 아침 해 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눈을 감고 바위에 앉아계셨다. 좌정(座靜)에 드시는 것이 일상이셨다. 아침 인사드리면 공부거리를 주신다. 햇볕이 따뜻한 어느 봄날. 우연히 소나무 밑에 있는 솔방울을 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선생님! 제가 솔 씨를 심어서 내년에 소나무를 보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 순간, 선생님이 대답을 해주신 것이다. "거기에 씨앗이 있어?"라고 되물으셨다. "예. 씨앗이 있습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문무답 수행 중 최초의 대화였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하신 것은 나의 수련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것을 인정해 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단성(丹成)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신선들의 교류와 대화
선생님은 설악산에 계시면서 다른 제자들도 두셨다. 100살이 넘는 분도 있었고 머리를 깎은 도인들도 있었다. 100살이 넘은 제자 중 멀리서 오신 분도 계셨다. 설악산 주변에서 온 분들이 더 많았다. 당시 산중에 전화 같은 통신 수단이 있을 리 없는데 그 분들이 불시불각(不時不覺)에 모이셨다. 입산 후 10년 정도 되니 그분들과 대화가 되었다.
시해등선(尸解登仙)
천우 선생님과 7~8년을 함께 지내니 심신합일(心身合一), 사제합일(師弟合一)을 이룰 수 있었다. 말이 없으면 말을 초월할 수 있다. 나는 천우 선생님을 몸으로 배웠고 마음으로 느꼈다. 선생님은 어머니 손을 놓은 지 얼마 안 되는 6살 때 세상 만물을 보는 물리(物理)가트였다고 하셨다. 히말라야 근처에서 태어났다면 큰 성인이 되셨을 것이다. 선생님과 함께 설악산에서 산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의 영(靈)이 암굴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으셨다. 정좌한 채 뼈와 가죽만 암굴에 남겨두고. 1979년 초가을인 8월 말쯤이다. 세수 107세에 시해등선(尸解登仙, 육신을 버리고 혼이 빠져나가 신선이 되는 것)하셨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신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선은 그저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고만 생각했고 그저 열심히 선생님을 따라하며 배우는 게 전부였다. 나는 100세가 넘어서도 얼굴이나 몸에 검버섯이 전혀 없던 선생님보다 60살이나 어린 젊은이였다. 그러나 팔씨름을 하면 피골이 상접한 분인데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바로 단전의 힘 때문이었다. 선생님께 빗겨 차기를 보여 드린 적이 있었다. 단 두 번을 해보시고 바로 제대로 발을 차시는 걸 보고 도를 이루면 모든 것이 통한다는 걸 실감했다. 장수대나 한계령 쪽에서 암굴 방향으로 사람이 오면 선생님은 보지 않고 냄새나 기운으로 알아채셨다. 따라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으니 산에서 17년 세월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나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선생님이 단식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절대 안 죽는다"라는 선생님 말씀을 믿고 49박 50일의 단식을 무사히 마쳤다. 만약 선생님이 옆에 안 계신 상태로 혼백을 놔뒀다면 영이 몸을 떠나 죽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등선하신 후 어느 날 선생님과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낭떠러지 절벽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따라 갈 때는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아주 편하게 걷던 길이었다. 뭔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산속에서 사람이 밟은 기운이 없는 땅을 정확히 골라 밟았다.
 천우 선생님이 신선으로 등선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돌아가신 후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설악산에서 내려와 뭔가 더 배우고 싶어 지리산, 계룡산 할 것 없이 전국의 산을 주유(周遊)하면서 다른 스승을 찾아다녔다. 당시 나는 당연히 천우 선생님 같은 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년을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스승이 더 이상 안 계셨다. 혹시나 해서 어렵게 찾아가보면 하나같이 실망스런 사람들이었다.
신선은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천우 선생님은 말없이 실천으로,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모습은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상상이나 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나 자신도 처음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줄 몰랐다. 평소에도 수십일 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계시곤 했으니까.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 이미 오장육부를 말리고 계셨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람은 항상 죽을 때를 준비하는 연습을 해야 하고 그것도 마지막까지 해야 잘 사는 것"이라는 선생님 당신의 말씀을 몸소 몸으로 가르쳐 주시고 떠나셨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6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세포는 3개월 단위로 바뀌는데 선생님은 가시기 6개월 전에 미리 세포를 2번 바꿔서 가실 날을 준비하신 것이다. 몸속에 모든 수분을 말리고 가셨기에 썩을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좌식(坐息)을 하고 계셔서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며칠 밖에 나갔다가 들어서는데 찬 기운이 확 느껴졌다. 그때야 비로소 "아! 선생님이 가셨구나"하고 깨달았다. 선생님은 생전에도 "대우주에서 받은 것은 대우주로, 지구에서 받은 것은 지구로 돌려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신선은 피와 땀의 결정체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도 신선이 '별다른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등선하시고 나서야 신선이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신선은 몸을 찾는 수련 과정에서 흘린 '피와 땀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결과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는 것처럼 몸에서 영이 떠나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3~4년간은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나는 언제나 몸에서 향내를 풍기시던 선생님과 지금도 함께 있고 싶다. 천우 선생님이 바로 신선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어디에 계신다' 고 하면 당장 모든걸 버리고 찾아갈 것이다.